인정받음을 쫒는 것은 극단의 모습을
가진 아수라백작이다.

인정받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인정은 존경 받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매슬로우는 존경의 욕구가 4단계 욕구이고
자아실현 밑에 있는 매우 고차원의
욕구로 위치했다.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업무와 관계에서
보여지는데 업무 성과가 타인에 비해
좋을 때 인정받고, 대인관계에서는 타인을 배려하거나 인정해주는데서 나도 인정을 받게 된다.
인정욕구는 그러므로 이타적인,
상대를 염두해 둔 상태를 가정한다.
(자아실현 욕구와 인정 욕구는
같은 수준이지만 전자는 방향이
안쪽이고 후자는 외부쪽이다.)
그런데
여기에 인정욕구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인정욕구는 타인을 염두해 두고 있기에
과도한 타인의식은 자아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업무 인정을 받기 위해 과도하게 일을
하거나 무리한 목표를 세워 진행하거나
타인의 공을 가로채는 경우도 있게 된다.
관계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타인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타인이 주는 아픔이나 제재를 참아야
한다. 나의 의견을 다 표현했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거나
배척당할 수 있다는 걱정에서 시작된다.
목사도 일반이다.
본인이 성도로부터 인정을 위해 성도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종종 설교에서 보여진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인간적으로 잘난
점을 설교중에 표현하는 것은 같은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인간차원에서 인정을
주고 받을 것이 없다. 오히려 인간의 모습은
작아지고 하나님만이 보여지기에
목사의 인정받음은 그 흔적조차 없다.
그러므로 좋은 목사는 절대 인간차원의 소재와 이야기를 설교중에서 자제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목사, 성도
등도 거론할 것이 없다. 청중인 성도의
초점이 성경과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설교후에 성도들이 나누는 말에
그대로 보여진다. 인간의 이야기가 소재로
사용된 설교는 거의 모든 성도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목사는 인정받음이 필요없다. 성도들에게서...
오직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인정만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목사들이 설교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이야기와 사람이야기와 위인 이야기와 헌금 많이한 집사, 권사, 장로
이야기로 소재를 삼는다.
설교 후에는 오직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본질만 이야기되고 묵상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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