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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ready, not yet

by 우면동소바 2024. 9. 22.

성경은 간접체험이고 직접체험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과 글은 하나님과의
체험을 한 사람의 글이기에 간접체험이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나의
직접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와
개인들의 생각을 이해해야 올바르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진리이지만
진리를 담은 그릇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대부분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그릇입니다.
유대교라는 수천년의 숙주를 이해하면
여기에서 자라난 기독교의 객관적
모습을 더 알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고난의 역사만을 가진 유대인들은 선민
사상을 기반으로 개인단위나 민족단위
에서 극히 주관적인 문화를 만들었습
니다.  선민, 구원을 기반으로 한 묵시
문화가 강하게 형성된 것입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로마정치,
다신교 헬레니즘 문화아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선
대척점에 있던 것이기에 순수 유대교
에서는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유대교는 헬레니즘 문화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아 천국과 지옥,
선과 악, 하나님과 사탄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묵시도 현재와
구원받은 미래에 대한 이원론적    
구조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와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와 지속
적인 싸움을 합니다.  왜 그런 관계가
예수가 돌아간 이후 현재까지 지속
되고 있을까요?

이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찌들린
유대교를 한순간에 허물어 버린
예수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 보는 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아직 천국은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묵시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현재
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 주(메시야)로 이미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현재
속에 심어 놓은 사건입니다.
즉, 유대교가 말하는 묵시의 종점을
현재화 시킨 것입니다.

예수의 등장과 십자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합한 사건인데
유대교는 여전히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것을 증명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이 명제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