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착합니다.
대학 입학하고 지금의 남부터미널에는
주유기 20대 있는 큰 주유소가 있었죠.
거기 사장님은 착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교회청년을 소개받아
일을 시켰습니다.
저도 거기에서 기름밥(?)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아나로그 주유기에
현금을 주고 받는 경우가 많아
주유원이 마음만 먹으면 돈 빼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탱크로리가 들어와 탱크에 기름을
채울 때면 차량 기울기에 따라
몇 백리터의 기름이 줄고 느는데
역시 마음만 먹으면 큰 돈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습니다.
각설하고
암튼 교인들이 착하다는 생각은
아직도 많이 유효한 듯 합니다.
교회 오빠라면 남편감으로 사위로
그닥 빠지지는 않습니다^^
교회 마크를 단 차가 실수로
사고를 내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착한 교인이 신앙적으로도
옳바른 길을 걷고 있을까요?
결론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착한 기독교인이 천국에
가지 못할 비율이 높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본인과 타인의 입장에서
올바르지 않은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일단 본인이 착하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착하지 못한 것은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착하게 친절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한 범위 안에 있으면 하나님도 그런
신앙인을 구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착한 것은 영적으로 옳바른 사람이라고
본인이 생각하고 남도 그렇게 여겨줄 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의 가장 큰
오해입니다. 착한 것의 평가는 인간이,
영적으로 올바른 것은 하나님이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판단은 아직
판단 전 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그 판단을 유추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착한 것은 인간의 판단이기에 반드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경험이 쌓인
것이거나 지금 인간의 행동과 언어로
유추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스스로 착하다는 생각은
착하다는 이 판단은 피조물에게 진정한
신앙관에 대한 오해와 자만을 만듭니다.
착하게 살면 착하게 행동하면 천국에
갈 확률이 높거나 최소한 착하지 않은
것보다 높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피조물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타인의 입장에서 '내가 착하다'는 것은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늘 신경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경쓴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내가 받는 평가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강박을 언제나 벗어날 수 있고
의미를 두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수준의 자존감을 가진 것입니다.
그 강박이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관점에 맞은 행동과 생각과 관계를 형성
하게 합니다.
없어도 주어야 하고 싫어도 표정을 바꾸지
말아야 하는 일이 즐비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영적으로
올바른 길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착한 일은 하나님을 '잘 하는 것'이고
이를 삶 중에 늘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앗수르를 사용해
수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기까지
했고 부모와 헤어지게 했고 마침내
예수를 이 땅에 보낸 것입니다.
정리하면
착하다는 것은 내 자신의 관점이나
타인의 관점이나 영적으로 올바른
것과는 무관합니다.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구원할 수
있다라는 작은 희망은 '예수가 내
구주'라는 고백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선교나 전도 조차도 내가 앞에 있고
나를 착하게 보이게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면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100이면 10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일을 한다지만 근원을 찾아가 보면
하나님은 거기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필요 조건은 됩니다. 전도에 약간의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 충분조건은 전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착한 행실로 인해 내가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 조금이라고 있다면 전도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로
성경 어떤 인물도 인간적인 행동이
착하다는 칭찬을 하나님께 받은 적이
없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행동만이 착하다고
칭찬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