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죄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매우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도들 대부분이 아담의 원죄에
대해서만 들었지 깊이 있는 죄에 대한
이해가 없음이 일반적입니다.
죄는 언제 발현될까요? 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말씀이 계시니
죄가 만들어집니다. 말씀이 없으면
죄는 없습니다. 그러니 죄의 대한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죄이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죄의 잣대를
대기 전에 입교부터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르게 해서가면 하나님의 침묵
즉, 말씀의 유보는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나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당위와
실천하지 못할 경우 죄를 짓게 되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는데
피조물의 죄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과는 사망이 됩니다.
죄에 대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 이 죄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죄가
있는 자'와 '죄 용서를 받는 자'로 구분되어
집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겐 관심조차
없습니다. 애굽에 던진 10가지 재앙은
애굽을 살리려고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죄인임을 깨닫는 자와 들어도
알지 못하는 진짜 죄인이 있습니다.
진정한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이 기적으로 나에게 남아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죄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안에서도 죄에 대해 아는
참기독교인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셔서 주신 말씀이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온전히 알지 못하므로
죄인이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 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 죄인이 되어
끝내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부로
구원하겠다는 약속이 있었으므로
예수가 죽어 그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즉, 죄을 이기셔서 모든 믿는 자들을
예수의 신부로 만든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도 말씀이 있었는데 이를
실천하지 않았기에 죄가 형성되었고
이 죄는 처음 죄이기에 원죄라 합니다.
도덕적인 사회규범을 어긴 것도 죄가
됩니까?
죄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도덕과 사회규범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회규범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죄입니다.
결국 사회도덕적인 죄와 기독교에서의 죄는
다른 범주이며 하나님이 보실 때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사람을 죽이며, 예수는 부모와 자녀를
갈라치는 일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이단의 폐륜에 가까운 행동을 보며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정통 기독교가 함께
욕을 먹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기독교가
아닌 집단의 비 이성적 행동으로 정의해야
합니다. 즉, 기독교가 아닌 집단의 행동입니다.
다시 죄의 정의로 돌아가 봅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순종
하지 않는 결과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곳곳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피조물의 입장이
아니라 창조주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석
하여 의미를 알고 순종할 때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의 문제는 교회안에 있는 성도에게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단순하에 원죄를 갖고 태어난 것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실천적 문제인 것입니다.
원죄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이미 구원하신 해결된
문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예수의 말씀을 주의깊게 보고
묵상하고 이해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인간 수준에서 이해되는 말씀도
있지만 묵시와 같이 함축된 언어는 시대와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도의 말씀에 대한 애씀과 노력이 있어야
우리는 진정 하마르티아 말씀의 과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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