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두렵죠!
하지만 우리에겐 죽음이 없어요!
공평한 것이 시간이며, 시간은
비교를 감소시켜 약자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강건해야 80년이고 잘 살아야
100년을 사는 사람의 수명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아무리 많이
가진 자에게도 공평하게 적용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건강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서 이를
유지하는데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합니다.
생명이라 함은 태어남을 전제로
합니다. 길에서 만나는 생명도
모두 태어났기에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살아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도 25년을 산다는
개도 태어남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의 태어남에 대해
현재 우리가 늘 보고 있는 자궁
태어남과는 다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육체의
탄생은 자궁탄생이지만 영혼의
탄생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호흡으로 생령을 받아
탄생한 것입니다.
흙에서 태어났고 그 흙은 먼지를
의미합니다. 그 먼지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음(=Nothing)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인간 타락의 역사의 곁에
땅(흙, 먼지)과 함께 기술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도 땅은 그
피를 품고 있었고 이를 고발합니다.
그러기에 땅(흙, 먼지)은 피조물의
역사에 늘 함께 했습니다.
우리를 대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땅으로 끌려간 것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 오는 여정도
땅이라는 것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성경의 죽음은
자궁과 흙 탄생이 다르듯 다릅니다.
자궁탄생의 죽음은 썩어져 갑니다.
그런데
성경의 관점에서 죽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본래 죽음은 탄생을
전제로 하는데 Nothing인 피조물에
죽음은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앞서 탄생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하나님은 우리를 무라고 하는데
무가 어떻게 죽음이 있겠습니까?
성도의 죽음은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고통에서 고통의
사라짐으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의 변화로 죽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성경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도로서의 삶이 정립되지 않습니다.
자궁에서의 태어남과 고통의 사라짐을
끝으로 본다면 모든 관점을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두고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삶으로의 이동을 죽음
으로 인정하고 그리스도가 이를 위해
오셨고 그 길을 예비하신 것을 인정
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모든 것입니다.
정리하면 성도의 죽음이 영원한
삶으로의 변화라면 지금 우리는
그 변화를 맞이할 준비로서 자기
부인과 순종의 신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자기 부인과 순종이 참 탄생인
것입니다.
#죽음#흙#무#참탄생